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6.3 항쟁 (문단 편집) == 계엄령 선포 == [youtube(s5NvGsLN9Jc)] 대한뉴스 <수도 서울에 계엄령 선포> 보도 반대 시위가 점차 전국적인 반정부 시위로 확산되자 [[6월 3일]] 오후 8시 비상[[계엄령]]을 전국에 선포하고 경찰들 외에 4개 사단 병력을 서울에 투입하여 진압 조치에 나섰다. 이와 동시에 일체의 옥내외 집회, 시위의 금지, 대학의 휴교, 언론·출판·보도의 사전검열, 영장 없는 압수·수색·체포·구금이 가능해졌으며 통행금지시간 연장 등의 조치가 취해졌다. 이때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겠다는 박정희의 양해 요구에 미국은 협력하였다. 이로 인해 당시 시위를 주도한 학생운동권 학생과 정치인, 언론인 등 1,120명이 대거 체포되었고 이 중 주도자 348명은 내란 및 소요죄로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 간 복역하게 되었다. 나머지 재야 인사들도 반정부 혐의로 체포되는 등 진압이 강경해졌다. 이때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이 박정희에게 강경한 대처와 함께 "각하 트럭 1000대를 징발해 주십시요. 학생주동자 놈들을 무인도로 격리해 쥐도새도 모르게 해치우겠습니다"라고 요청했는데 옆에 있던 법무장관 [[민복기]]가 "그건 초월적인 위법 행위이고, 그랬다간 시위만 더 확산된다"고 반대하자 박정희는 "그래 그건 할 수 없다. 그 짓을 해서 전 국민을 적으로 만들겠다는 건가?"라며 그만두었다. 참고로 이 시위의 주동자격 인물들은 훗날 제17대 대통령을 역임하게 되는 당시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 직무대행(고려대 상과대학 학생회장, 총학생회장 직무대행 중) [[이명박]]을 비롯해 [[중앙대학교]] 학생 [[이재오]]와 [[서청원]],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생회장 [[김덕룡]]과 영어영문학과 학생 [[한광옥]], [[경기고등학교]] 학생 [[손학규]] 등 하나같이 이후 정계의 거물급 인사들로 성장한 이들이었다. 특히 김덕룡과 이재오는 구속되는 선에서 끝난 게 아니라 학교에서도 제적당했다. 한편 박정희는 항쟁이 격화되자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 필요성을 호소하며 일종의 [[극일]]을 하자는 요체의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하는데 이는 원론적으론 타당한 말이었지만 당시 분노한 대학생과 재야 인사들의 반발을 누그러뜨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이 문제는 국민들 사이에서도 주요 이슈가 되며 해방 이후 한동안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있던 [[반일]] 의식이 확 솟구치는 계기가 되었다. 1965년 말 서울대에서 강연을 한 '14대 심수관(임진왜란 때 끌려간 [[도공]]의 후손)'의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 한일 국교 정상화 반대로 대학가가 시끄럽던 때였지만 자신은 계란을 맞을 각오로 "당신들이 36년의 한을 말한다면 나는 360년의 한을 말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미래로 나아갈 수는 없는 것 아닌가”라고 강연장에서 말했다고 한다. 그러자 강연장은 일순 고요해졌지만 좀 지나자 누군가가 일어서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를 부르기 시작했고 이후 모두가 일어서서 노래를 부르며 무대를 향해 걸어와 서로 껴안고 눈물을 훔쳤다고 한다.[[http://www.joongdo.co.kr/main/view.php?key=200905040231|#]] 이런 일화를 보면 여론이 반일로 뭉쳤던 건 맞지만 [[혐일]]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이런 반발 속에서도 한일간 협의는 계속되었고 계엄령이 해제된 1년 후인 1965년 12월 한일 양국은 결국 국교 정상화에 합의하여 해방 20년 만에 외교 관계를 복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승만 정부 이래 15여년 동안 끝없는 줄다리기로 이어지던 [[한일수교]]가 이루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